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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이노니아
짐승에게 절하지 말라
 회원_766769
 2022-11-06 10:04:52  |   조회: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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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왕인가?’ 이것이 신약성서의 복음서와 요한계시록의 공통 주제다. 물론 그 대답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성서는 답한다. 예수의 탄생과 복음의 배경은 로마 제국의 압제하의 식민지 유대였다. 로마의 정치권력과 유대의 종교권력이 야합했을 때, 유대 백성의 삶은 도탄에 빠졌다. 그것의 제일 원흉은 로마 제국의 황제였다. 그는 스스로를 신의 대리자며 아들이라고 칭했다. 폭력적으로 식민지 백성의 고혈을 짰다. 식민지 백성에게 로마 황제는 그런 존재였다.

어느 시대든 제국은 힘의 논리 위에 건설된다. 힘으로 약소국을 침탈하고 식민지 백성을 압제한다. 유대 민족이 간절히 기다려온 메시아사상은 이런 제국의 지배질서 안에서 꽃피운 이상이었다. 그 메시아가 로마 제국보다 우월하고 강력한 힘을 가지고 압제에서 해방시켜 주기를 소망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의 일대기와 복음서, 계시록이 기록된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힘으로 나라를 침탈하고 사람을 압제하며 착취하는 왕권에 대한 대안으로서 평화의 왕이었다. 그 평화의 왕이 바로 예수라는 것이다. 군마(軍馬)를 타고 위용을 과시하는 왕이 아니라 나귀를 탄 겸손한 왕이었다.

그런데 복음서에서는 나귀를 탄, 겸손과 평화의 왕으로 묘사된 예수가 요한계시록에서는 군마를 타고 세계를 폭력적으로 심판하는 군왕으로 등장한다. 복음서와 전혀 다른, 이질적인 모습이다. 크로산은 이 부분에 대해 당대의 역사적 상황과 맥락에서 성서를 볼 것을 요청한다(J. D. 크로산의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가’). 계시록이 기록된 당대는 로마 황제의 폭압 정치가 극에 달했다. 식민지 유대 백성과 초대교회의 입장에서는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없을 것처럼 비춰졌으리라. 우리 왕 예수가 폭력적으로라도 로마 제국을 파탄내 주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요한은 계시록을 쓰면서 그림언어 안에 수많은 정치적 상징들을 배치시켜 놓았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666이라는 상징수다.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666)이니라.”(요한계시록13:18). 요한은 666이라는 수를 ‘짐승의 수’라고 말한다. 그의 다른 서신(요한1,2서)에서 이를 ‘적그리스도’로 암시한다. 헬라어는 각 철자마다 고유한 숫자가 지정되는데 이를 게마트리아라고 한다. 사람 이름도 게마트리아로 말하는 게 당대의 상징기법 중 하나였다. 666을 게마트리아로 보면 ‘네로 황제’라는 뜻이다. 종교 탄압이 극에 달했던 초대교회의 지도자 입장에서 로마 황제를 짐승으로 직접 표현하기 어려우니 이 게마트리아로 말한 것이다.

네로 황제, 즉 ‘로마 제국의 황제는 짐승이다. 이 짐승에게 절하지 말라. 우리의 진짜 왕은 황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다. 황제의 폭력적 지배 질서는 우리의 참된 왕 앞에 아무것도 아니니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라’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주된 메시지다. 정치와 군사, 경제적 강제력을 동원하여 사람을 압제하는 권력자를 요한은 짐승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우리말에 ‘짐승 같은 놈’, 혹은 ‘짐승 새끼’라는 관용어가 있다. ‘son of bitch’라는 영어의 관용어에서도 사람을 짐승에 비유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짐승이란 타자에 대한 공감능력이 없는 인간에 대한 상징어다. 짐승은 오로지 자기 욕구를 채우기 위해 이기적으로 행동한다는 고대의 관념에 따른 것이다. 인간이 가져야 할 타자에 대한 이해와 존중,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지켜야 할 윤리와 도덕,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인격적 감수성 같은 것이 없을 때, 그런 인간은 짐승이 된다. 그런 짐승이 권력을 갖게 될 때 많은 사람이 고통 받게 되고 한 사회가 무너지게 된다. 짐승에게 절하지 말라는 계시록의 메시지는 이천 년 전의 한정적 상황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뜻있게 새겨야 할 메시지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사람과 짐승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래서 요한은 ‘그 짐승의 수를 세어보라’고 말한다. 즉, 어떤 사람이나 사건을 현상 그대로 보지 말고 게마트리아로 숫자를 세어보듯 그 내용과 의미를 따져 이해하라는 것이다. 이런 이해력이 있는 사람을 요한은 ‘총명한 자’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정도의 이해가 가능한 총명한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사람과 짐승을 구분하지 못하고 짐승에게 절하고 있으니, 그 짐승에게 짓밟힌 생명이 바다에서 죽고 길거리에서 압사당해 죽는 것이다. 교회가 짐승에게 절한 대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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