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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리는 없다
 회원_114318
 2023-03-14 15:31:59  |   조회: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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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글로리>를 두고 그런 우스개 아닌 우스개가 있었다. 한국에서는 복수를 하는 일조차도 대학 나와서 교사와 같은 번듯한 직장을 얻어야 가능한 일이라고.

그런데 생각해보면 문동은이 대학을 나와서 교사를 했기에 복수가 가능했던 건 아니다. 애초에 복수 대상이 '어설픈' 권력자였기에 복수가 가능했을 뿐이다. 무당 끌어들여 포주 노릇하면서 돈 긁어모은 아줌마와 기상캐스터인 그 딸, 중형교회 목사 하면서 적당히 세금 탈루하고 돈 모은 아저씨와 마약 빨면서 미술가연 하는 그 딸, 부모의 골프장 물려받아 굴리면서 패션샵 하나 연 아들, 그리고 부모가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는 스튜어디스와 패션샵 연 친구의 시다바리 노릇하는 양아치. 이런 어설픈 조합이니 대학 가서 교사 하는 정도로도 복수가 가능한 구도가 잡혔던 것뿐이다.

만일 하도영이 악역이었다면 어땠을까. 혹은 주여정이 악역이었다면 어땠을까. 한국에서 이름 깨나 알려진 건설회사의 사주, 혹은 서울 시내 대형종합병원장의 아들이 문동은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장본인이었다면 어땠을까. 복수는 애초에 불가능했을 것이다. 굳이 현실의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글로리>의 서사를 볼진대 이런 '진짜' 권력자들의 조력이 없었다면 문동은의 복수는 불가능했다. 하도영의 암묵적인 동조나 주여정의 적극적인 '칼춤'이 없었다면 문동은의 복수는 인터넷에 박연진의 학폭 폭로 글이나 올렸다가 조용히 사그라드는 정도에 그쳤을 것이다.

복수조차도 대학을 나와야 할 수 있다는 건 '일면'에 불과하다. 아니, 대학을 나왔으니 복수가 가능할 정도로 한국사회가 공명정대(?)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살 만한 곳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복수를 가능하게 했던 건 가해자인 어설픈 권력자들을 마음만 먹으면 찍어누를 수 있는 진짜 권력자들이 동조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처보다 바둑으로 만난 정체 모를 여성의 손을 들어준 중견건설사 사장, 자기 앞날이고 지위고 다 내던지는 한이 있더라도 대신 칼춤 춰주겠노라며 묻지마 사랑을 선보인 병원장 아들네미, 이런 동화적 혹은 신화적 조력자들이 없었다면 문동은의 복수는 찻잔 속의 태풍조차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런 것 아닌가, 소작농이 마름한테 복수하는 일에 대해 지주가 적당히 편을 들어준 것. 하필 못된 것은 마름이었고 지주들은 꽤나 정의롭거나 혹은 낭만적이었다. 이렇게 바꿔놓고 보면 얼마나 동화적인 세계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학폭이란 그렇게나 동화적인 이야기였던가. 악독한 어설픈 권력자를 처벌하기 위해 약자와 진짜 강자가 느슨한 연대를 갖추고서 이 어설픈 권력자들을 나락으로 빠뜨릴 수 있을 만큼의 해피엔딩을 기대할 수 있는 이야기였던가.

어쩌면 <글로리>의 학폭은 내가 학교를 다니던 1990년대의 그것과 오늘날 벌어지는 사회문제로서의 그것 사이 어디쯤엔가 있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학창 시절 내가 목격했던 학폭의 주인공들은 대체로 그냥 '불량한 것들'이었고, 경제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보잘것 없는 배경을 지닌 애들이었다. 그냥 주먹질 좀 잘 하고 놀 줄 안다는 이유로 가해자가 되었던 것이 그 시절의 학폭이었다. 지금의 학폭은 그렇지 않다. 이제는 진짜 강자가 가해자가 된다. 그래서 가해자는 가해자가 아니라 강자로서 살아남고, 피해자는 피해자가 아니라 약자로서 압살된다. <글로리>의 가해자는 강자이자 동시에 불량한 것으로, 그네들의 배경이라는 것도 압도적인 강함을 갖춘 것이 아니라 '더 강한 누군가'와의 확고한 연결고리가 없으면 언제든 무너져내릴 취약한 것이 아니었던가.

심지어 악당의 조력자들조차도 초라했을 뿐이다. 경찰서장조차 되지 못한 경찰 조직의 부패한 중간관리자나 말귀도 제대로 못알아듣는 양아치 - 심지어 그 중 하나는 불법이민자요 - 혹은 신내림도 제대로 못 받아서 점도 엉망진창으로 보는 무당 정도였다던가. 문동은이 조력을 얻어낸 이들의 면면과 비교해보면 그 초라함은 더욱 배가된다.

얼마전 불거졌던 모 유력인사 자녀의 학폭 문제와 이 드라마가 비교되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그 유력인사는 어설픈 경찰 중간관리자도, 골프장 주인도, 기상캐스터도 아니다. 심지어는 병원장 아들이나 건설사 사장조차도 뛰어넘는 '찐' 강자다. 이런 강자를 중심으로 벌어진 학폭이란 과연 <글로리>의 그것처럼 징벌되고 해소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그 답을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이 가해자가 되고 그 자리에 가해자 대신 강자를 우겨넣는 세상임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현실은 드라마보다도 더욱 잔혹할 것이요, Glory는 그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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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14 15:3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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