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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아무래도 점쟁이에게 같이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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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아무래도 점쟁이에게 같이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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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3.26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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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아무래도 점쟁이에게 같이 가봐야겠다.”

어머니가 아내에게 찾아와 점을 치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삼십 대 초반의 일입니다.

그때 나는 사업이 망해 완전히 거덜이 난 상태였습니다. 빚도 엄청나게 많이 져서 날마다 빚 독촉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집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밤마다 술이 떡이 되도록 취해 집에 들어갔습니다.

아내의 눈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결혼한 지 불과 몇 년 만에 기어코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너무 건방을 떨었습니다. 내가 사업만 시작하면 금방 돈을 삼태기로 긁어모을 줄 알았습니다.

어려서부터 물건을 잘 팔았습니다. 수완이 좋다는 말도 많이 들었습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부터였습니다. 아버지 장례를 마치고 돌아온 날 새벽, 어머니가 이불 뒤집어쓰고 숨죽여 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습니다. 그때 결심했습니다. 이제부터는 내 힘으로 공부하겠다. 절대 혼자 된 어머니 신세지지 않겠다.

나 스스로 한 약속을 지켰습니다. 당장 그날부터 신문배달을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소년가장이 되었습니다.

닥치는 대로 무수히 많은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무슨 물건이든 내 손에만 쥐어지면 척척 잘도 팔았습니다. 군대 갈 때도 오히려 어머니께 용돈을 드리고 갔습니다.

내 힘으로 공부했습니다. 내 힘으로 대기업에 취직했습니다. 내 힘으로 결혼도 했습니다. 나는 정말 우리 어머니의 유일한 자부심이었습니다.

결혼하려고 처갓집과 상견례 하던 날 우리보다 훨씬 부자인 사돈댁에 주눅 들지 않고 어머니가 당당히 말했습니다. “얘는 생활력이 강해요. 절대 댁의 따님 고생시키지 않을 거예요.”

나도 그럴 줄 알았습니다. 평생 내 여자를 고생시킬 일은 없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착각이었습니다. 나도 틀렸고 어머니도 틀렸습니다.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나와 처음 시작한 사업은 일 년도 가지 못하고 쫄딱 망해버렸습니다.

그때부터 뭐 하나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발버둥 치면 칠수록 빚만 더 산더미처럼 늘어났습니다. 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 놈인가? 내가 이렇게 무능한 놈이었던가?

날마다 술에 절어 살았습니다. 등신 중의 상등신이 바로 나였습니다.

어머니가 보다 못해 우리 집에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같이 점쟁이 집에 찾아가보자고 강권하셨습니다.

아내는 결혼하기 전 교회에 다녔습니다. 주일학교 반사도 하고 예배시간에 피아노반주도 했다 합니다.

그러나 나와 결혼하고 나서부터는 더 이상 교회를 다닐 수 없었습니다. 우리 집은 불교집안인데다 분가하기 전인 신혼초기엔 무려 이십 명 가까운 시집식구들을 섬겨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시어머니 손에 이끌려 용하다는 점쟁이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점쟁이에게 들은 이야기는 충격이었습니다.

우리는 워낙 궁합이 안 맞는 부부가 만났기 때문에 앞으로도 뭐 하나 되는 일이 없을 테고 결국은 이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을 막으려면 부적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부적 하는 비용이 엄청났습니다. 가진 거라고는 빚밖에 없는 우리로선 꿈도 꾸지 못할 큰돈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점쟁이 집을 나왔습니다. “얘. 우리가 어디서 그런 큰돈을 마련하겠니? 집이라도 팔아야겠다.”

숨죽이며 시어머니 뒤를 따라 걷고 있던 아내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때 아내의 눈에 퍼뜩 십자가가 들어왔습니다.

푸른 하늘 위로 어느 교회의 십자가가 우뚝 솟아있었습니다. 아내가 두 눈을 크게 뜨고 하늘 위에 높이 걸려있는 십자가를 바라보았습니다.

아아. 십자가. 십자가.

그때 아내의 귀에 천둥소리 같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돌아오라. 내 딸아. 돌아오라. 돌아오라.”

아내의 두 눈에 눈물이 솟구쳤습니다. 그리고 담대히 시어머니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어머니. 저 부적 안 할 거예요. 저 이제부터 교회 나갈 거예요.”

그리고 정말 다음날부터 새벽기도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시작한 새벽기도를 수십 년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계속하고 있습니다.

아내가 수십 년 세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죽어라 새벽기도를 다니는 동안, 우리 집엔 상상도 못했던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쫄딱 망한 주제에 맨 날 술이나 처먹고 다니던 패죽일 남편 놈은 우리나라 최초의 기독교복음만화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나중엔 목사까지 되었습니다.

술이나 처먹고 다니던 패죽일 놈을 남편으로 둔 아내는 교회사모가 되었습니다. 아내를 점쟁이 집으로 데리고 갔던 어머니는 권사님이 되어 작년에 자는 듯 편안히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아내는 용감합니다. 우리 집으로 시집와서 시집에 붙어있던 귀신들을 다 내쫓아버렸습니다.

아내는 귀신 잡는 해병입니다. 아내가 기도하면 귀신들이 벌벌 떨고 다 도망칩니다.

나는 귀신 잡는 해병을 꽉 잡고(?) 삽니다. 그러므로 나는 더 용감합니다.

우리는 귀신 잡는 용감한 부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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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찬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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